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19. 19世 〉27. <부정공>평은공휘진팔가장(坪隱公諱鎭八家狀)
1. 문헌 목록 〉19. 19世 〉29. <부정공>담헌공휘진룡묘갈명(湛軒公諱鎭龍墓碣銘)
1. 문헌 목록 > 19. 19世 >  
28.<부정공>담헌공휘진룡행장(湛軒公諱鎭龍行狀)
湛軒公諱鎭龍行狀 公諱鎭龍字文如湛軒其號也先祖歷代則先府君務本齋行錄中詳悉載在則不必疊錄焉考諱基信妣濟州梁氏命輔女學圃彭孫後也曰基孝若興德張氏顯良女又海州崔氏珏鉉女乃公本生父母也崔氏以純祖癸亥三月十六日生公自幼諄謹直諒曁移天爲叔父後事親一以養旨爲主溫淸甘旨靡不盡誠侍疾不解衣帶供藥進粥必躬親執勞不暫許人代彌留四年曾無一日或懈及遭艱喪襄盡禮哭泣致哀追遠竭誠祭田墓儀修擧無遺節愍公褒典之下凡百經紀不委諸宗而躬先之嘗大饑人皆斫松皮代糧諸山盡赭而相戒勿犯屢世邱木賴公而無羔於本生伯氏盡友于之道恒衣食必先兄而後巳適體之物可口之味製之買之必備兩件而奉獻其一畫宵聯床怡怡談笑夜久必親布伯氏衾褥待伯氏就寢然後退歸私寢至老白首不衰構小齋於龜湖之上扁之以湛樂埍箎成韻遠近士人多賡和而蘆沙寄先生嘗入其齋美其事而題之此公孝友實行而治家之正接人之節各得其宜幼時對案方食團飯置掌中竢案退徐起呼狗而投之曰見不潔宣露致逆衆冑長老異之及長議論爽明所持守者必以重議輕財厚本抑末爲主嘗發解禮圍爲考官所枳被選見拔絶不應擧公姊兄李龜城台成京友洪金化稷周憫其抱玉不售之勸以曲徑周旋公耻之若浼豁達施與賙窮濟乏每有常度過時昏葬必助之以成禮四方之貧病無依者多賴而救活分遺不贍族威於農庄所在使之作業値飢歲輒興巨役厚給雇直土木瓦石諸匠賴而得全盖意在救荒非欲侈垣屋也湖路過客日歸之如自家者館室難容而公必區別如薛邑之舍飢必食寒必衣病必藥俾各得歡心人或請拒則公答曰以天下爲一家視萬物如一身雖不可追聖賢力量賓客之來何可疎外而拒之乎故流民每襁負其子而至者多不可勝算尤惓惓於獎勵後生築齋貯籍以資來讀者故附近多賴遇良辰美景速賓友娛文酒風流韻致令人聳感故四面春風之評騰於輿頌鄕人嘗擧狀聞官矣年纔五十八而終于哲宗庚申十月二十七日訃所至莫不慟惜曰善人亡矣葬在所居住住岩面漾碧上麓丁原夫人豊川盧氏光鼎女玉溪稹后祔公墓右育四男二女男善浩珪浩兌浩璉浩星州李仁淳竹山安德洙壻也伯生秉斗秉文秉周李秉權朴埈植妻仲生秉準秉仁秉祚叔生秉哲崔東翼李鍾承妻季生秉年柳璿妻曾孫蕃然不可盡記而今主鬯者淇煥也秉文以松沙奇公宇萬所撰碣文請不侫狀其行不侫辭非其人而不獲焉窃惟公以忠孝裔孫趾述家業克立仁本重內輕外爲一代之善士而刺史不能薦聞使公終老林下者固可爲世途之感然隱居修行積善而遺后昆者旣皆爲君子尙論之所取則公之不朽來後垂法久遠矣但籍不侫之拙辭哉玆敢以彝性之感畧加增刪如右云云 歲舍丁巳陽月下旬日 月星 崔永祚 謹狀 담헌공휘진룡행장(湛軒公諱鎭龍行狀) 공의 휘는 진룡이요、 자는 문여(文如)며 담헌은 그 호이다、 선조 역대는 선부군 무분재 행록 가운데 자세히 다 실려 있으므로 거듭 기록할 필요가 없다。 고의 휘는 기신(基信)이요、 비는 제주 양씨(齊州梁氏) 명보(命輔)의 따님으로 학포(學圃) 팽손(彭孫)의 후손이다。 소생 부모는 기효(基孝) 및 흥덕 장씨(興德張氏) 현랑(顯良)의 따님 해주 최씨(海州崔氏) 각현(珏鉉)의 따님인데 공은 최씨가 낳았다。 순조(純祖) 계해(一八○三)년 三월 十六일에 공이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행실을 지극히 삼가하고 정직·진실 하였는데、 숙부의 후계로 출계하여 한결같이 뜻을 받드는 것으로 주장을 삼고、 거처와 찬수에 정성을 다하며、 어버이의 병환이 있으면 의대를 풀지 아니하고、 약을 다리고 죽을 끄린것을 반드시 몸소 친히 수고하여 잠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아니하고 四년을 계속하되 일찌기 단 하루라도 태만하게 한 것이 없었다。 상사를 당하여는 초상 장사에 예를 다하여 곡읍하여 슬픔을 다하고、 멀리 추모하여 정성을 다하며、 제위토와 석물을 빠짐없이 마련하고、 절민공(節愍公)을 포양한 은전이 내리자 범백 가지 일을 다른 종인에게 미루지 않고 몸소 먼저 하였다。 한번은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 모두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 식량을 대신하여 모든 산이 다 벌거숭이가 되었으나、 선산 만은 서로 범치 말자고 경계하여 여러 대의 표송이 공으로 말미암아 무양하였다。 생가 백형에게 우애의 도리를 다하여 항상 의복과 음식을 반드시 형님 먼저 드린 뒤에 자기가 하고、 몸에 맞는 물건과 구미에 합당한 반찬을 만들고 살때는 반드시 두 벌을 준비하여 한 벌을 드렸으、 밤낮으로 자리를 함께하여、 즐겁게 담소하고 밤이 오래되면 반드시 백씨의 이부자리를 친히 펴고 백씨가 잠자리가 든 뒤에 물러나기를 늙어서 흰 머리가 되도록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작은 집을 귀호(龜湖) 위에 지어 담락(湛樂)이라는 현판을 걸고 화기 애애하게 노래하고 글을 읊으니、 원근 선비 벗들이 이어 화답한 자가 많았다。 노사(蘆沙) 기 선생이 일찌기 그 집에 들러 그일을 가상히 여겨 글을 썼으니、 이는 공의 효우한 실행이며、 집안을 다스린 정사와 사람을 대접한 절차가 각각 적의 하였다。 어릴때 식탁에서 여럿이 음식을 먹다가 찌꺼기는 손바닥에 숨기고는 상내기를 기다려서 일어나며 개를 불러 던져 주고는 「불결한 것을 보고 밥먹을 때 말하면 여러 사람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이다。」 하니 어른 들이 특이하게 여기었다。 장성 하면서는 의론이 명쾌하며 가지고 지킨 바가 반드시 의리를 중히 하고、 재물을 경시하며、 근본을 후하게 하고 지말(枝末)을 억누를 것을 주장하였다。 일찌기 향시에 나갔다가 시관의 해를 입어 합격이 취소되자 다시는 절대로 과장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공의 자형 구성 이 태성(李台成)과 서울의 벗 김화 홍 직주(金化洪稷周)가 공이 재능을 지니고도 벼슬하지 못함을 어색하게 여겨 뇌물을 주고라도 ᄌ선하라 권고하니、 공이 더러운 말을 들은 것처럼 부끄러워 하였다。 남에게 베풀고 주기를 활달하게 하여 궁하여 굶주린 자를 먹이고、 모자란 자를 구제하되 매양 법도가 있고、 때가 지난 혼인과 장례를 반드시 도와 치르게 하니、 사방에 가난하고 병들어 의지없는 자가 많이 힘입어 구제되었다。 족척에게는 평소에는 넉넉하게 나누어 보내지 아니하고、 농장있는 곳에 일을 시키고는 흉년을 만나면 문득 큰 역사를 일으켜 품삯을 후히 주니、 토목과 석공 장이가 힘 입어 목숨을 구해 살아났는데 이는 뜻이 빈민 구제에 있어서 이지 담장과 집을 사치하게 꾸미고자 함이 아니었다。 호남 일대 과객이 날로 자기집에 드나들듯이 한 자가 많아 객실에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자 공은 설읍(薛邑)의 집과 같이 구별하여 주린 자는 먹이고、 추운 자는 입히며 병든 자는 치료하여 그들의 그 환심을 얻었다。 사람이 혹 거절하라 하면 공은 대답하되 「천하로서 한 집을 삼고 만물을 한 몸처럼 보아 비록 성현의 역량은 따를 수 없으나 과객이 오는 것을 어찌 괄시하고 막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떠돌이 백성이 매양 그자식을 강보에 싸 업고 오는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후생을 장려하는데 더욱 정성스러워 집을 짓고 책을 모아 배우러 온 자를 기다렸기 때문에 부근의 수재가 거기에 힘입어 성취한 자가 많았다。 좋은 때와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손님과 벗을 청하여 글과 술로 풍류를 즐기니、 그 운치가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고 감동하게 하였으니、 사방에서 춘풍(春風)같은 찬송하는 노래가 고을에 드높고 고을사람이 일찌기 천거하는 글을 관부에 올리었다。 철종(哲宗) 경신(一八六八) 十월 二十七일 향년 五十八세로 별세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착한 사람이 죽었다고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순천부 주암면 양벽정 위 산기슭 정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 풍천 노씨(風川盧氏)는 광정(光鼎)의 딸로 옥계(玉溪) 진(稹)의 후손인데 공의 묘소 우측에 부장하였다。 아들은 선호(善浩)·규호(珪浩)·태호(兌浩)·연호(璉浩)요 딸은 성주(星主) 이 인순(李仁淳) 죽산(竹山) 안 덕수(安德洙)에게 출가하였으며 손자 병두(秉斗)·병문(秉文) 병주(秉周)와 이 병권(李秉權)·박 준식(朴埈植)에게 출가한 딸은 큰 아들 소생이요、 병준(秉準)·병인(秉仁)·병조(秉祚)는 둘째아들 소생이며 병철(秉哲)과 최 동익(崔東翼) 이 종승(李鍾承)에게 출가한 딸은 세째아들 소생이요、 병년(秉年) 유 선(柳璿)에게 출가한 딸은 막내아들 소생이며 증손 현손 이하는 번성하여 다 기록하지 아니하다。 이제 이 일을 주장한 자는 기환(淇煥)인데 병문(秉文)이 송사(松沙) 기 우만(奇宇萬)공이 찬술한 갈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그 행장을 청하니 내가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절하다가 되지 못하였다。 내가 생각하니 공은 충효 고가의 후예로 가업을 이어 기술하여 능히 어진 근본을 세우고 안을 충실히 하고 밖을 경홀히 하여 일대의 착한 선비가 되었는데 수령 자사들이 천거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늙어 마치게 하였으니 진실로 세도의 삭막함을 느끼겠다。 그러나 숨어 살며、 몸을 닦고 착한 행의를 쌓아 후손에게 끼친 것이 이미 다 군자의 높은 의론을 취한 바 되었으니 공의 아름다운 사행이 영구히 전할 것이니 어찌 나의 졸필에 의지 하겠는가 이에 감히 그 떳떳한 인륜에 감동하여 대략 이상과 같이 보태고 덜어 쓴다。 월성(月星) 최영조(崔永祚) 삼가 씀
 
1. 문헌 목록 〉19. 19世 〉27. <부정공>평은공휘진팔가장(坪隱公諱鎭八家狀)
1. 문헌 목록 〉19. 19世 〉29. <부정공>담헌공휘진룡묘갈명(湛軒公諱鎭龍墓碣銘)